연운보전투와 탈라스전투 보고서 HA
- ceden320
- 2020년 12월 16일
- 2분 분량
연운보전투와 탈라스전투 보고서
연운보전투와 탈라스전투
연운보 전투와 탈라스 전투의 비교를 통해 고선지의 위대함을 설명한 글입니다. 연운보탈라스전투
1. 서론
2. 본론
1) 고선지는 누구인가
2) 연운보 전투
배경·경과·의의(결과)
3) 탈라스 전투
배경·경과·의의(결과)
3. 결론고구려 유민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상의 장애를 이겨내고 당나라 최고의 무장으로 성장한 고선지. 그는 탁월한 지략과 지도력에 힘입어 당대 서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신분상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사회적 냉대와 차별 속에서도 고선지는 굳건히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되고, 그로 인해 당 제국의 흥망성쇠는 고선지의 그것과 맥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연운보 전투와 탈라스 전투를 다루면서 고선지를 미리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하겠다.
본고에서는 연운보 전투와 탈라스 전투의 발발배경과 경과, 또한 그 의의(결과, 영향)와 그 속에서의 고선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본론
1) 고선지는 누구인가
고선지가 당으로 옮겨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그의 아버지 고사계가 당으로 잡혀 와서 당시 고구려인들의 강제 집단 포로 거주지였던 영주(營州:지금의 요녕성 조양)부근에서 고구려 여인과 결혼해 고선지를 낳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고구려인 강제 거주지인 영주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선지는 그이 아버지로부터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의 교육을 받게 된다.
고선지는 20여세의 나이로 안서에서 당의 유격장군이 된다. 젊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의 유격장군 발탁에 대해 그 당시 중국인 사가들이 곱지 않은 유권 해석적인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고선지는 젊은 나이에 큰 공을 세웠던 게 분명하다.
고선지는 출중한 용모와 무예를 겸비했던 인물이다. 용모가 수려했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했다. 무인으로서 좋은 조건을 모두 구비했던 셈이다.
그런 그는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부임한 개원말 이후부터 소질과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거듭 발탁되게 되고 출중한 역량 덕분에 파격적으로 승진하게 된다. 개원 말에 고선지가 안서부도호와 사진도지병마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안서도호부의 명실상부한 이인자가 되어 실크로드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서부도호 자리는 당에서 고구려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다.
또한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도호부의 병권(兵權)을 독점하던 막강한 자리였던 도지병마사가 되었다는 사실도 고선지의 역량이 얼마나 출중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겠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5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연운보전투와 탈라스전투
파일이름 : 연운보전투와 탈라스전투.hwp
키워드 : 연운보전투와,탈라스전투
자료No(pk) : 161177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