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멸망 Report GQ
- ceden320
- 2020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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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멸망 Report
고려왕조의 멸망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과 이성계의 집권 및 고려왕조의 멸망에 대해서 작성했습니다. 한국중세사-고려왕조의_멸망(완성)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⑴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⑵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⑶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1) 이성계 집성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위찬탈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⑴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공민왕 23년(1374) 반원개혁정치를 지속해 왔던 공민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고려말 정국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였다. 더구나 어린 우왕을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로 신권을 장악한 이인임은 정치개혁보다는 권력유지를 위한 파행적인 족당(族黨)정치를 운영함으로써 고려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켜갔다. 게다가 이 시기는 100여 년간 고려정치를 간섭해왔던 원(元)이 쇠망해가고 명(明)에 의해 대륙의 패권이 재편되는 시기여서 외교노선을 둘러싼 친원파와 친명파라는 권력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에 왜구의 창궐이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져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가재정의 고갈을 부추겨 고려왕조의위기를 재촉하였다.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하고 명실상부한 실권자로서 정국을 주도해 갔고 공민왕 때 신돈의 집권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최영·경복흥·지윤 등의 무장세력을 정계에 복귀시켜 그들의 협조를 받아 국내 집권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우왕이 등극한 사실을 명나라에 알림으로써 우왕 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사 살해사건과 원에 의한 탈탈불화의 고려왕 임명은 외교적인 난제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인임은 원·명 양국 모두에게 사대를 취하는 이중외교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양국을 견제하면서 우왕의 왕위계승을 정당화시켜 자신의 집권기반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양면외교는 대내적으로 친원·친명파의 대립이라는 지배층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집정권신과 신진사대부 사이에는 대원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번번이 대립하였다. 대외정책을 둘러싼 시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제동은 이인임 자신의 집권안정에 방해요인이 된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으므로 이인임은 그들의 요구에 끌려다니기 보다는 이들을 제거하는 쪽을 택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공민왕 16년(1367) 이래 국학중흥과 친명개혁정치를 통해 성장하여 이제는 정계의 중진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기 전에 그 근원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인임은 우왕 원년(1375) 6월 우헌납 이첨과 좌정언 전백영이 친원정책을 선두지휘하고 있는 자신과 지윤을 명사살해 등 4죄로써 처벌해야 한다는 청주상소(請誅上疏)를 올리자 전녹생·박상애 등 사대부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7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고려왕조의 멸망
파일이름 : 고려왕조의 멸망.hwp
키워드 : 고려왕조의,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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